제국의 투기장... 각지에서 몰려든 격투가들과 한쪽 팔에 귀신을 담은 귀검사, 귀족에 의해 훈련된 전투 노예들... 그리고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난폭한 몬스터들이 뒤엉켜 싸우며 서로를 삼키려는 아비규환과 같은 풍경이 매주 벌어지고 있다.
왜 이리 치열하게 싸우는가? 투기장에서 연승을 거두어 챔피언이 되는 자에게는 황제가 특별히 소원을 들어주는 전통이 있다. 자유의 의지로 모인 강자들은 돈과 명예를..., 전투 노예들은 자유를 소원하며 싸우고 있다.
패배가 곧 죽음으로 직결되는 투기장에서 챔피언이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우승자가 나오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마창을 사용하는 '마창사'라로 불리는 자들이다.
제국의 영주들은 주민들의 아이들을 여러 가지 이유로 사병으로 거둬들인다.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라거나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겠다는 등의 이유로 부모에게서 빼앗듯 아이를 데려온다.
영주에게 끌려온 아이들은 전투 노예로 살게 된다. 전투 노예의 삶이란 끔찍할 수밖에 없다. 일체의 감정은 배제되었고 오직 상대를 살육하기 위한 교육만 이어졌고 아주 적은 양의 배식만 지급되었다. 배고픔에 굶주린 전투 노예들은 서로의 식량을 빼앗기도 했다.
종종 죽음에 이르는 아이들이 발생하는데 상대를 죽인 아이에게는 더 많은 식량이 배급되었다.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약한 아이들을 공격해서 도태시켰다. 결국, 50명가량의 한 소대 내에서 생존하는 아이는 다섯 명 정도였다.
끔찍한 기초 훈련 끝에서 생존한 아이들은 별도의 훈련을 받을 수 있다. 아이들은 영주의 가문에서 내려오는 귀족 무술을 배울 수 있었다. 드디어 투기장에 진출할 준비가 된 것이다.
영주들은 전투 노예들에게 자기 가문의 무술을 뛰어남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이는 매우 효과적이어서 우승한 전투 노예를 훈련한 가문의 영주 또는 훈련 조교는 제국군의 높은 지위를 하사받기도 했다. 또한, 전투 노예들은 훌륭한 실험 대상이었다.
귀족들이 수련에서 필요 없이 다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가문의 무술을 다듬을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상대 가문의 무술을 연구하고 무기를 개량했다. 초식을 다듬고 약점을 보완했다.
영주들은 투기장에 참여 가능한 전투 노예들에게 '노예'라고 부르는 법은 없다. 영주들은 자신들이 노예를 거느리는 파렴치한 귀족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영주들은 전투 노예를 '마창사'로 부르며 제법 괜찮은 대우를 해준다.
전투 노예들이 챔피언만 돼 준다면 잠시 그들을 마창사로 부르며 비위를 맞추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투사들도 자신의 영주에게 무한의 감사와 존경을 느끼며 가문을 위해 희생도 불사하게 이른다.
그래서인지 일부 마창사들은 챔피언이 되어 자유의 몸이 된 후에도 여전히 가문에 남아서 영주의 군사가 되기도 하거나 제국군의 간부로 들어가기도 한다.
은퇴한 마창사들 대부분은 거금을 들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마을 대부분은 대전이로 사라져 버린 후이거나 그들의 부모 또한 죽은 지 오래다. 몇몇은 새로운 곳으로 정착을 원하지만, 그것마저 쉽지 않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자신의 몸에 깃든 무술을 봉인하고 육체 곳곳에 스며든 예기(銳氣)는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날카로운 기운을 느껴본 적 없는 일반인들은 그들에게 위화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마창사들은 일반인들에게 거부당하였고 강제로 추방당하거나 스스로 마을을 떠나 자신을 헐값에 팔았다.
어차피 돌아가서 쉴 고향도 부모도 없었다. 과거의 기억이라고는 끔찍한 수련과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기억뿐... 모험가의 길을 걷거나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을 이용한 제국에 반감을 느끼고 레지스탕스에 몸담는다.
결국은 투기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자들도 있다. 어릴 적 저지른 잘못과 자신의 몸에 배어 있는 귀족의 무술을 지우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렇게 다시 자신을 사지(死地)로 이끈다.
육체는 사지에 있으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전투가 끝난 후 단 하나의 동지인 마창을 대지에 박아 넣고 강인한 창 자루에 기대어 쉴 때 비로소 진정한 휴식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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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전투의 최전선에 서서 누구보다 용맹하게 적을 쓰러뜨리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마창의 강력한 힘에 매료된 자들로, 마창이 뿜어내는 파괴력에 도취하여 더욱 강한 적을 찾아 헤맨다.
목숨을 건 싸움 속에서 담금질 된 그들에게 붙은 이름은 '뱅가드'. 누구보다 앞서 나아가는 모습 그대로의 이름이다.
한 전투가 끝나면 다음 전장으로 향하는 그들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달린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돌진하는 그들 뒤를 따르는 것은 수많은 병사. 열세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뱅가드의 투지와 활력은 난전을 승리로 이끈다.
그러나 그들의 지나치게 호전적인 성격을 싫어하는 이도 많으며, 특히 마창을 부끄러워하는 다른 마창사들은 뱅가드를 몹시 배척한다.
심지어는 경멸을 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뱅가드를 죽이기 위해 덤벼드는 마창사도 많다.
하지만 뱅가드에게 이것은 절호의 기회.
어제의 동료라고 해도 그들은 자신의 마창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 수 있는 찬스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잔인하고 사나운 전사, 뱅가드.
이들의 일생은 당신의 짐작대로 대체로 짧고, 끝이 좋지 않다.
마치 파도와 같다. 거세게 휘몰아치지만 끝내는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가 그들이다.
그러나 모든 뱅가드가 작은 물방울이 되어 흩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위에 부딪혀 멈추는 파도가 있으면 바위를 부수는 파도도 있는 법이다.
소수의 뱅가드는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 치열하게 싸워 살아남아 마창의 힘을 한층 세련되게 가다듬었다.
이들의 날카로운 창 앞에서는 제아무리 단단한 방패를 가지고 있어도 살아남기 어렵다.
만약 전장에서 뱅가드를 만난다면 다가오기 전에 도망치거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자신의 창에 겁쟁이의 피를 묻히기 싫어하는 그들 앞에서 목숨을 구할 방법은 오직 그뿐이니까.
각성명 | 레버넌트(Revenant)
잘게 부서진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깎여나간 정신은 더 이상 의지를 품지 못한다.
완전한 멈춤. 길게 덮이는 죽음. 그 종국에서 돌아오는 것은 기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흘릴 피도 모자라건만 기어이 무릎을 펴고 허리를 세워 창을 드는 모습은 기괴의 극치.
불사는 아니다. 수천, 수만 번 되돌아올 뿐. 그렇다면 망령이라 불리기 충분하리라.
죽었으되 움직인다. 죽은 자가 끝까지 움직인다면 산 자를 죽이는 것 또한 가능.
무엇이 그를 붙잡는가. 어떤 집착이 굳어버린 폐와 심장을 뛰게 하는가.
적은 지극한 공포와 함께 눈을 감으니, 뒤바뀐 승패 앞에 돌아온 자는 비로소 산 자가 된다.
각성명 | 워로드(Warlord)
그때가 말이야, 지금부터 한 5년 전쯤 됐으려나?
별다른 꿈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벌어 사는 내 삶이 짜증 나고 지겨워서, 제국 귀족의 부대에 입대한 적이 있었단 말이지.
운이 좋아 큰 공을 세우면 나도 한몫 잡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야. 뭐 죽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만큼 당시의 난 모든 게 무료하고 답답했으니까.
근데 그 부대에 정말 귀신같은 놈이 대장으로 있었어. 저주받은 창인지, 귀신들린 창인지 아무튼 보기만 해도 섬뜩한 창을 다루던 놈이었는데,
더 섬뜩한 건 그놈의 눈빛이었어. 같은 편조차 피할 정도로 차갑고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다니까?
뭐 그래도 그놈이 우리 편이라는 사실이 그만큼 든든할 수가 없었지. 어떤 적이든, 결국 그놈이 휘두르는 창에 박살 나곤 했거든.
근데 이런 일들도 반복되니까 전장도 조금씩 무료해지더라고. 매번 승패는 뻔했고, 나는 뒤처리만 하면 됐으니까.
그런데 그 날만큼은 달랐어. 왜냐면 적들 맨 앞에 그 귀신같은 놈이 한 놈 더 있었거든. 그냥 보는 순간 알았지. 우리 쪽 귀신 놈이랑 같은 부류구나 하는….
와~ 그 귀신같은 놈을 적으로 마주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때야 처음 알게 됐다니까? 그때의 절망감과 공포는…. 아직도 가끔 꿈에 나올 정도니까.
뭐 다행히 우리 편에도 귀신같은 놈이 있었으니 그나마 두려움은 덜했지. 근데 1:1 대결에 두 명의 승자란 있을 수 없는 거잖아?
그러니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하더군.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우리 쪽 귀신 놈이 진다면, 그 뒤에 벌어질 일이야 뻔했으니까 말야.
이런 불안감은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어. 우리 쪽 귀신 놈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더니 몇 번씩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길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뻗어버렸거든.
다행히 죽은 건 아니었지만, 평소처럼 그놈이 되살아나 적을 베어버릴 것이라는 희망이 그때는 전혀 생기질 않더군. 그만큼 상황이 절망적이었으니까.
근데 이때부터야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그놈이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다시 상대에게 달려들어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더라고.
물론 적 귀신 놈은 더 대단했지. 그 강력한 공격들을 전부 여유 있게 막아내고 있었으니 말야. 근데 그 순간 일이 벌어졌어.
우리 쪽 귀신 놈의 엄청난 포효와 함께 순간적으로 붉은색 빛이 강하게 번쩍였던 거 같은데, 정신 차리고 보니 그놈의 창이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대해져 강력한 힘을 흉흉하게 내뿜고 있더라고.
조금 과장하면 하늘을 꿰뚫는 거대한 기둥 같은 모습이었어. 아무튼, 우리 쪽 귀신 놈이 그 거대한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그놈의 공격대상은 적 귀신 놈 한 명이 아니라 적 진영 모두인 것 같았어.
창을 휘두를 때마다 하늘과 지면이 베어지며 수많은 적들이 쓰러져가고, 적 귀신 놈 역시 점점 치명상을 입어가더군.
허~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공포라곤 모를 것 같던 적 귀신 놈의 무표정한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다 못해 공포에 질려가는 그 표정을 말이야.
승부는 그대로 끝났어. 결국에는 적 귀신 놈을 완전히 베어버렸거든. 아니, 그놈만 베어버린 게 아니지.
우리의 뒤처리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모든 적들이 이미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고, 상대 쪽 지면은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지. 하~
정말 우리 쪽 귀신 놈을 따라다니며 믿기지 않는 광경을 많이 봐왔다 생각했는데, 그때의 광경만큼은 정말 현실이 아닌 듯했어.
어쨌든 이런 광경을 본 건 이때가 마지막이었어, 난 그 전투를 마지막으로 그만뒀거든. 왜냐고?
적들을 전멸시킨 후 우리를 향해 돌아보는 우리 쪽 귀신 놈의 그 흉흉하고 살벌한 기운이 정말이지 너무 두렵고 소름 끼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전장에 남겨진 형체를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수많은 시신들과 폐허를 보면서 그제야 내게도 삶에 대한 욕심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다는 걸 느끼게 된 거지.
일반적인 죽음을 훨씬 넘어선 이 섬뜩한 광경을 보니, 살고 싶어 미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웃기지그래?
그 뒤에도 그놈에 대한 소문은 종종 듣곤 했는데, 뭐더라 워로드? 암튼 뭐 좀 있어 보이는 이름으로 불리긴 하던데, 그놈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얼마 전에 워로드라 불리는 놈이 근처를 지나간다길래 혹시나 해서 숨어서 지켜봤는데 내가 알던 그놈은 아니더라고. 근데 그 섬뜩한 기운만큼은 판박이더구만. 흐~
여기까지야, 내 얘기는.
뭐? 요새 유행하는 "전장의 게임"이라는 소설과 내용이 흡사하다고?
어디 그런 지어낸 얘기랑 비교하고 그래? 좋아, 그럼 담에 워로드를 또 마주치게 되면 그땐 너의 집 주소를 알려주지. 귀신들린 창을 다루는 놈이 살고 있으니 찾아가 보라고 말야.
그때도 지금처럼 비웃어볼 수 있나 보자 이놈아.
- 제국 변방 작은 마을의 한 술집에서 벌어진 대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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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난 것은 가을의 짧은 해가 서산을 넘어가려던 무렵이었다.
찌르기에서는 쇼난의 날카로움을, 휘두르기에서는 제국의 묵직함을 보여준 그에게서는 켜켜이 쌓인 모래의 냄새가 났다.
누구보다도 강하고 빠른 창술로 상대를 압도하는 그에게 환호가 쏟아졌지만 나는 그가 무언가를 억제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경계하고 있었는지는 스승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마창이라는 끔찍한 힘을 다룰 수 있는 자였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도 자연스럽게.
하지만 그는 마창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다. 간혹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익히 들어온 특유의 사특한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마창사를 직접 보았는데도 반감이 들지 않았다. 그의 창술은 순수하게 강력했다. 마치 사람의 힘만으로도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보여주듯이.
날이 밝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향하던 그의 모습을 눈에 새겨둔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소문을 듣게 되었다.
세상에 '듀얼리스트'라 불리는 자가 있어, 각지를 떠돌며 무술을 익히고 결투를 통해 가다듬는다는 것이다. 재차 확인할 것도 없이 그의 이야기임을 알았다.
얼마나 결투를 좋아했으면 많고 많은 이름 중에 하필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결투에 미친 그저 그런 싸움꾼인가? 높은 뜻을 품은 고고한 무술가로 생각했던 나는 실망하여 스승님께 여쭈었다.
"수행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결투에 집착하는 걸 보면 단지 실력을 뽐내고 싶은 게 아니겠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버리고 싶기 때문일 게다."
"무엇을 버리고 싶어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야 그만이 알겠지. 하지만 그의 창술을 다시 떠올려 봐라. 짐작이 가지 않느냐?"
입을 다물었다. 그가 끝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마창의 힘. 그 속뜻을 짐작한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혹시 누군가 나와 같은 오해를 품었다면 부디 이 말을 하고 싶다.
저주스러운 마창을 억누르기 위해 닥치는 대로 힘을 키워야 했던 그의 고뇌와 아픔을 우리는 감히 짐작하지 못 한다고.
각성명 | 하이랜더(Highlander)
평생을 떠돌이로 살아온 하이랜더에게 뿌리를 묻는 것은 시간 낭비다.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며, 한 점의 가치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전사에게 싸움 이외의 것이 필요한가? 뼈저린 과거, 고고한 이상. 그런 허울 좋은 말이 방패가 된 적이 있던가?
하이랜더는 행동으로 가치를 증명한다. 전사답게 이슬 맺힌 초원을 달리고 칼날 같은 바람에 곧게 맞선다.
왕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에 슬퍼하지 않으며, 신에게 행운을 기원하지도 않는다.
고독할지언정 집 지키는 개가 되어 먹이를 구걸하지 않는 그들은 남겨질 이름이 없음에 슬퍼하지 않는다.
죽음은 그저 죽음이며,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그 모습은 다른 누구보다 전사의 본질에 가깝다.
한 줌 모래가 되어 뿌려질지언정 발에 채는 돌멩이가 되지 않는 하이랜더. 가장 오래된 전사의 명맥이 여기, 이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각성명 | 듀란달(Durandal)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수쥬 변방의 작은 촌락에서였다. 고문서라면 가치가 떨어지는 물건이라도 높은 값에 매입하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수소문한지 사나흘 만에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당시 내겐 가치가 있을만한 문서도 없었고,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진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없었으나, 야간 경비 일을 시작하게 된 건물의 문헌 보관소에서 그럴듯한 것을 몇 권 빼돌리기로 했다. 당시엔 그 뭣보다 돈이 필요했었다.
그에게 이름을 묻자 그는 짧게 '듀란달'이라는 대답을 남겼다. 사람 이름이라 하기엔 이상했고 차림새 또한 오랜 풍파에 찌든 듯했으며, 등 뒤에는 천으로 단단하게 싸맨 기다란 물건(아마도 창병기이리라.) 등등 수상쩍은 점이야 한 둘이 아니었지만, 대전이 이후 이런 차림새의 인간들이야 종종 볼 수 있는 일이었고 내게 중요한 것은 책들의 값어치였으니 그런 것쯤은 적당히 무시하기로 했다.
"이렇게 합시다. 붉은 책 다섯 권은 합쳐서 이 정도 금액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다만 이 푸른 문헌들은 원래 자리에 돌려 놓으시는 게 좋겠소."
시작이 좋은 것 같았다. 그 파란 것들은 다른 책들과 달리 금고에 보관됐었던 것들로, 위험을 감수하고 선임 경비가 잠든 사이 열쇠를 빼돌린 보람이 생긴 셈이었다.
"아니 아니 선생님. 제가 예까지 오는데 무려 보름이 걸렸습니다요. 저도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찾아뵌 것 아니겠습니까?
부디 잘 살펴봐 주십쇼."
과장을 섞었지만, 책을 빼낸 시점부터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보다 그를 닦달하면 어느 정도의 금액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한 마음에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이 것들은 아까 물건들의 열 배 가격으로도 모자랍니다. 어디서 얻으셨는지는 모르나 뒷일은 본인이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그에게서 돈을 받아들고 미리 계획해둔 경로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결과.
"더... 이상은... 도저히 못 뛰겠어요 아빠..."
그 결과 나와 딸아이는 제국과 그들이 고용한 추격대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숲 길에 몸을 숨기거나 정신없이 달려댄지 벌써 일주일이 지난 듯 했다. 챙겨 놓은 식량이나 물품들도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 남자의 마지막 경고가 떠올랐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다시금 제국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추측컨데 제국 기사들은 숲 속에서의 행동에 꽤나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들이 고용한 가면의 남자 2명 이었다. 경비 일을 하던 당시에도 본 적이 있는 자들로, 그들이 외출 후 돌아올 때 마다 건물의 창고에는 각종 물건들이나 끌려와 구금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온갖 잡다한 의뢰를 처리하는 일종의 전문가 겸 해결사로 제국의 건물 관리자들은 그들을 그저 사냥개라 부르곤 했다. 결국 해가 질 무렵 우리는 드디어 꼬리를 밟혔다. 말발굽 소리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고 생각했으나 거대한 고목의 가지 위에 좌우로 올라선 가면의 2인조를 맞딱뜨리게 된 것이다.
"문서는?"
가면 때문인지 숲의 사방을 메우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딸아이를 위해 돈이 필요했습니다. 어떻게든... 목숨만은..."
되는 대로 말해 보았으나 그들은 서로를 잠시 마주본 후 품에서 각각의 비수를 꺼내 들었다. 딸아이를 위해 몸이라도 던져야 할 판이지만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면의 남자들이 손을 움직였고 한 쌍의 비수들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공포에 질린 딸아이의 표정과 날아드는 비수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지만 역시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에 눈을 감으려던 순간 일주일 전에 만났던 그 남자가 불현듯 나타난 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창은 날아드는 비수의 궤적을 비틀어 이미 멀찌감치 튕겨낸 것 같았다. 뭐가 되었던 헛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딸아이만큼은 무사가 보장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 몸에 벼락같은 고통이 올 거라 생각하며 딸에게 남길 마지막 말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난 것 같음에도 나에게 날아왔어야 할 비수는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경고를 드렸던 겁니다만..."
목소리가 들린 쪽은 딸아이 쪽이 아닌 나의 앞쪽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부르르 떨리는 창끝이 시야에 잡혔다. 다시 딸아이 쪽을 바라보자 딸의 앞에 버티고 서 있던 그 남자의 형체는 마치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흩어져가고 있었다.
가면의 2인조는 잠시 멈칫한 것 같았으나, 이내 수십 개의 암기를 흩뿌림과 동시에 쇄도해 들어왔다. 무예를 전혀 모르는 내게도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방어를 강요하게 만든 뒤 일격에 끝을 보겠다는 의중이 느껴졌다. 날려진 암기들이 시야를 가득 메우는 듯이 날아들자 내 앞의 남자는 다시 창을 치켜들었다.남자가 창을 움직이자 사람이 밀려날 정도의 강력한 풍압과 함께 내 앞쪽의 암기들이 전부 날아간 것 같았다. 그리고 정신없이 돌풍을 일으키던 그의 창은 동시에 또 다른 회전을 일으키며 딸아의 쪽의 암기들 또한 전부 튕겨내고 있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금속파편들에 놀라 움찔하는 순간 딸아이 쪽으로 달려들어간 가면의 남자가 이미 창끝에 꿰인 채 축 늘어져가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 쪽으로 달려들던 자에게 황급히 몸을 돌려 보았으나 내 시선이 닿았을 때는 그 자 또한 이미 몸에 십수개의 혈흔을 남긴 채 스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있어 저 일련의 과정들은 서너개의 공격과 방어가 완전히 같은 시간에 일어난 것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제국은 공식적으로는 민간인에게까지 손을 대진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 저런 살수들을 마주치실 수는 있을 겁니다."
나는 그저 정신없이 고개를 끄떡이다가 그가 적어 준 어딘가의 장소로 딸아이와 함께 도망치듯 흘러 들어왔다. 나중에야 듣게 된 말이지만 그는 제국 투기장 출신의 방랑자로 전이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무인 집단에 소속된 인물인 것 같았다. 그들은 그들의 활동으로 인해 여러 단체와 대립하고 있는 듯 했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내가 마침 그 남자와 대립 관계인 적들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팔아넘겼던 문헌들의 내용으로 보건데 그가 상대할 적은 비단 그 뿐만은 아닌 듯 했다.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보다 강대한 적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헌을 팔아 그에게서 얻어낸 돈은 언젠가 이자를 쳐서 돌려 줄 생각이다. 왠지 그런 마음을 먹지 않으면 자신을 고대 무구의 이름으로 소개한 정체불명의 남자를 다시는 보기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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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던전앤파이터 공식 홈페이지
http://df.nexon.com/df/guide/TO/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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