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밤, 그리고 이른 아침
사령부로 돌아온 운은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이미 시곗바늘은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그는 얼굴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거울을 보니 달아오른 얼굴이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대답이 궁한 것을 숨기기 위해 마신 몇 잔의 술이 이렇게나 독한 줄 몰랐다.
그에겐 잭터를 배신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가 입대한 것은 어떤 목적 때문이었고, 그 목적에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잭터 이글아이가 반드시 무사할 것.' 그래서 그는 가까이서 잭터를 지킬 수 있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지키기 위해 보좌한다는 방침이 바뀌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이대로 잭터를 계속 돕는 게 과연 지키는 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귀족들은? 제국은? 모두를 하나의 뜻으로 뭉치게 했던 전쟁과는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
"......"
운은 책상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별생각 없이 오른손으로 뚜껑을 열려던 운은, 그러나 입술을 깨물며 왼손으로 열었다. 상자 안에는 여러 번 쓴 구급 키트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꺼낸 것은 진통제였다. 물도 없이 약을 삼킨 후, 작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플라시보 효과라던가. 약의 효과가 벌써 돌 리 없는데도 아픔이 점차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의사의 처방 없이 구할 수 없는 이 진통제는 군의관이 몇 통 빼준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점점 효과가 짧아지고 있다. 이것보다 강한 걸 찾으려면 이제 마약밖에 없다는 경고를 들었는데.
"...어떻게든 될 거야."
제이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원래 제일 뛰어난 건 흑발이지만 적발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던 제이. 밝은 금발의 레베카는 제이와 운이 키득거리는 걸 보며 화를 냈었다.
'나, 그때는 웃었지. 뭐가 즐거웠던 걸까.'
잘 안 움직이는 오른손을 억지로 움직여 양쪽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하지만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뺨의 상처가 도드라져 몹시 보기 싫었다. 그날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증거. 친구를 잃고 가족을 잃은 주제에 혼자 살아남은 죄를 끊임없이 각인시키는 흉터. 운은 거울을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코트를 벗고 셔츠의 오른팔 소매를 어깨까지 접어 올렸다. 팔꿈치 위로 흰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한 손만으로 붕대를 풀고 피에 물든 거즈를 떼어 약을 발랐다. 아팠지만, 익숙했다.
총상은 숱하게 겪었지만 화살에 의한 상처는 처음이다. 어제, 병실이 모자라 분노하는 군인들을 달래러 잭터가 병원을 찾았을 때 호위하다가 다친 것이다. 위문이 계속되던 중,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이 수상하여 확인하러 갔다. 인적이 드물고 엄폐물이 많은 곳. 그러나 잭터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곳. 아니나 다를까 복면을 두른 괴한들이 숨어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천계에서 보기 드문 활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행히 큰 충돌 없이 괴한들은 물러났으나 운은 미처 화살 한 대를 피할 수 없었다. 꽤 깊은 상처였지만 가뜩이나 불안한 상황에 불안을 더할 수 없었기에, 그는 부상을 숨기고 잭터를 계속 수행했다. 물론 주변 수색과 경비 강화를 꼼꼼히 명령한 후에. 하지만 범인은 끝내 찾을 수 없었고 다친 지 몇 시간이 지나서야 의무실에 간 운은 온갖 잔소리로 귀가 얼얼해져서 돌아왔다.
그게 어제저녁의 일. 오늘 낮에 다시 찾아갔어야 했는데 바쁘다며 가지 않았으니 내일 또 혼날 것이다. 군의관의 일을 늘려버려 참으로 면목이 없다.
부하들이 두고 간 결재 서류를 확인하고 다른 부서에서 요청받은 자료를 정리하고 나니 벌써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깔끔히 마무리한 후 다시 진통제를 한 알 삼켰다. 배고프지는 않았지만 왠지 한기가 돌았다. 피곤하다. 이대로라면 두 시간 정도는 꿈을 꾸지 않고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가기 전에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언제나 단정하게. 잭터나 다른 동료들이 싸잡혀 비난받지 않도록. 운은 머리를 빗고 모자를 고쳐 쓴 후 밖으로 나왔다.
사령부를 나서니 이른 시간부터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운동하는 사람도 있고 상점 앞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쓰러져 자는 사람도 있었다. 차림새를 보니 아랫세계에서 온 모험가 같았다. 천계와 아랫세계의 길이 뚫린 후 하늘나라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은 점점 늘고 있다. 관광 수입도 따라서 늘고 있지만 한편으론 치안 문제가 급증하여 늘 사람이 모자란다. 운은 곤란해하는 상점 주인을 대신해 취객을 깨워 돌아가게 했다.
"이봐! 거기! 꼬맹이 라이오닐이 아닌가!"
불안정한 발소리와 함께 술기운에 오른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귀족가의 영애들이 술병을 든 채 웃고 있었다. 기억에 없는 얼굴이다. 아마 노스피스로 피했다가 겐트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일 것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맞지? 하하하! 사진보다 귀엽게 생겼네!"
아라드보다 천계가 예절에 더욱 엄격한 나라임은 사실이지만, 당연히, 예외는 있다. 부모 간섭에서 벗어난 한창나이의 귀족 아가씨들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운의 외모를 품평하기 시작했다. 운은 이들을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도 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귀족과 대립하고 있는 잭터가 마음에 걸렸다. 어떤 빌미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있고말고. 우리 이제 몇 차냐... 아무튼 술 마시러 저~기 갈 건데, 너도 같이 가자. 가서 술이나 따라."
운을 둘러싼 여자들은 그의 몸을 툭툭 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혀만 쯧쯧 찰 뿐으로, 가던 길을 멈추진 않았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 것에 기세가 오른 여자들은 운의 손을 억지로 잡거나 가슴팍을 만지며 깔깔거렸다. 하지만 운은 이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거기. 뭣들 하는 짓입니까?"
절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도 익히 아는 사람.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한 점 주름 없는 제복을 갖추어 입은 그녀는 몹시 엄한 얼굴로 술주정꾼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저는 황녀의 정원 소속 마를렌 키츠카입니다. 귀족인 것 같은데 길 한가운데서 무슨 짓입니까? 게다가 군인한테. 술 마셨으면 가던 길이나 가세요."
황녀의 정원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젊은 귀족들은 꼬인 혀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냅다 도망쳤다. 마를렌은 말세라고 중얼거리다가, 가련한 피해자를 뒤늦게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이오닐 대령? 아니, 당신이었나요?"
"키츠카 수석궁녀님. 안녕하십니까."
"왜 가만히 있었죠? 비키라고 하지."
"저한테 뭔가 할말이 있는 듯해서 듣고 있었습니다만."
"저런 건 무시하고 가도 돼요. 화내도 되고요."
"아. 화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까?"
진심으로 하는 질문에 마를렌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녀는 "음... 어, 그건... 으음..." 등의 말을 흘리더니,
"...테미 대위한테 물어봐요."
책임을 떠넘겼다. 황녀를 호위하는 마를렌은 잭터의 부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마를렌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도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운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그래요. 아무튼 다음에 저런 사람들과 만나면 소리를 지르거나 싫다고 말하고 가버리세요. 어차피 무력으로 당신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 상대가 귀족이라 해서 감내하고 있을 필요도 없어요. 알았죠?"
"조언 감사합니다."
"그쪽도 귀족 때문에 고생이 많겠군요. 이쪽도 자꾸 간섭해 와서 골치가 아픕니다. 자기들 휘하로 회유하기도 하고... 대장군님도 필시 머리를 싸매고 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만 저도 가던 길을 가야겠습니다. 황녀님이 요즘 불면증이 있으신 것 같아 보양식 재료를 사러 가는 중이에요. 앞으로 더 바빠질 테니 대령도 몸 잘 챙기고..."
마를렌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들고 있던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더니 예쁜 포장지에 싸인 무언가를 건넸다. 달콤한 냄새와 함께 봉투 안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운의 손을 살며시 데웠다.
"애플파이예요. 전에 반 님이 좋아하시길래 아랫세계의 조리법을 몇 개 더 알아봤어요. 아직 아침 먹기 전이죠? 식기 전에 우유랑 함께 드세요."
"감사합니다."
공손히 인사하는 운을 보며 마를렌이 뿌듯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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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던전앤파이터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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