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7. 전쟁의 전조
「여왕님! 아니될 말씀이옵니다!」
흑요정 원로들의 수장 [샤프론]은 목소리는 칼칼하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단호했다.
「그동안 우리가 인간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어 왔습니까. 마법도 쓸줄 모르는 그 미개한 종족을 도와주기 위하여 지금도 궁중 마법사이신 [샤란]님이 파견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번 일은 명백한 도발이자 용서할수 없는 배신행위입니다. [아이리스]님의 점괘는 전염병을 퍼뜨린 것이 인간이라고 분명히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인간의 도시에 군대를 파견함을 명하여 주십시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존경하는 여왕님!」
언더풋의 궁중에는 수십명의 흑요정 원로들이 여왕 [메이아]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왕에게 인간과의 전쟁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흑요정 마을 [노이어페라]에 전염병이 퍼져 하루아침에 마을사람들 모두가 죽어버린 사건. 분명 중대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전염병을 퍼뜨린 범인으로 그동안 호의를 베풀어 왔던 인간들이 지목된 뒤, 흑요정 원로들 대부분에게 이성과 침착성은 더이상 덕목이 되지 못하는 듯 했다. 모두가 강력하면서도 완벽한 복수를 원하고 있었다.
여왕 곁에 단정하게 서있던 [클론터]가 입을 열었다.
「분명 아이리스님의 점괘는 그렇게 말해주고 있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겐 마법이란 힘이 있지만 인간에 비하여 수가 매우 적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그리고 비록 인간들은 마법을 쓸 줄은 모르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 자신의 신체를 이용하는 싸움 방식을 연구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무조건 감정으로 해결할 일이 아닙니다. 이번일은 좀더 자세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샤프론이 소리쳤다.
「자네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고작 인간들 따위한테 겁을 집어먹다니! 자네같은 겁쟁이가 여왕님의 직속 전령이라고 앉아있으니 여왕님께서 저렇게 결정하시기를 망설이고 계시지 않는가!」
원로들은 저마다 소리를 높여 한마디씩 했다.
「지금 당장 벨마이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자구!」
「배은 망덕한 인간들 같으니라구.」
「아이리스님의 점괘라면 틀림없어. 무엇을 더 조사한단 말인가.」
「이봐 클론터. 인간들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원로들의 소란스러운 주장들 사이에서 나이든 흑요정 한명이 조용히 걸어나와 정중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소인, 연금술사 [모건]이라고 합니다. 소인은 이번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었습니다. 이제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소인이 직접 전염병이 퍼진 마을로 가서 전염병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고 증거를 찾아보겠습니다. 만약 정말 인간들의 짓이라고 밝혀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대륙에서 인간들의 자취를 완전히 없애버리도록 하죠.」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나긋한 음성. 그것은 사실 극도의 분노의 표현이었다. 극한에 다다른 분노의 감정은 그 표출 대상을 명확히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윽고 여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건님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조사를 허락해 주겠어요. 흑요정 최고의 연금술사이신 모건님이 직접 조사해 주신다면 무언가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건님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도록 하죠.」
흑요정 여왕 메이아는 어리지만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여왕님. 한시가 급합니다. 이미 화친을 깬 상태인데 인간들이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줘서는..」
「샤프론님의 뜻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우리가 논하는 것은 전쟁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흑요정들의 생존에 큰 위기가 올 수도 있는 문제예요. 일단 전염병의 진범에 대하여 확실한 조사를 하고 한편으로는 혹시 있을지 모를 전쟁에도 대비하겠습니다. 샤프론님께서 직접 군대를 조직해주시면 좋겠네요. 하지만 인간들의 짓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밝혀질 때까지 우리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임을 다들 명심하세요.」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였지만, 이는 여왕의 명령이었다.
「예. 존경하는 여왕님.」
궁정의 모든 신하들은 한목소리로 머리를 숙였다.
. . .
여왕의 궁정. 클론터는 문 앞에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여왕은 아까 대신들이 둘러싸고 있던 그 자리에 여전히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여왕님. 부르셨습니까.」
「클론터님이시군요. 들어오세요.」
클론터는 크게 한번 숨을 집어삼키고, 여왕 앞으로 다가갔다. 여왕의 핏기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건은 떠났나요?」
「예. 아까 회의 이후에 바로 짐을 꾸려서 떠났습니다.」
「인간들과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흑요정은 인간들을 경시하고 있지만 제 생각으로는 인간들을 그렇게 만만하게 봐서는 안됩니다. 자칫하면 우리 흑요정 전체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왕의 눈썹은 찡그려졌다.
「클론터님, 부탁이 있어요. 클론터님이 모건과 가까운 곳에 머물면서 그를 지원해주세요. 그리고 샤란님과 연락을 취해서 인간들에 대한 정보를 더 모아주시구요.」
「예. 지금 바로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클론터는 돌아서려다 망설이듯이 말을 이었다.
「저.. 여왕님.」
「네. 말씀하세요.」
「인간들 역시 우리와 전쟁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마법의 힘을 두려워 하고 있을테니까요. 또한 제국은 여기저기서 동족인 인간들과 전쟁을 벌이느라 우리와 싸울만한 힘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 상태입니다. 만약 정말로 우리와 싸울 생각이라면 정식 군대가 아닌 다른 수단을 동원할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용병... 말인가요?」
「사실 돈으로 고용된 용병이나 제국의 군대는 원로들의 말대로 우리가 크게 두려워할 존재가 아닙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모험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최근에 아라드 대륙을 여행하면서 신체를 수련하고 전투 기술을 익히는 모험가들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모험가들 중에서는 마법을 쓸 줄 이도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인간들도 이제 마법을...?」
「제 생각에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인 듯 합니다. 아직 자세한 정보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언더풋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헤들리스 나이트]도 그 모험가들을 당해낼 수 없다는 말인가요?」
「모험가들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헤들리스 나이트만으로는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클론터님의 생각은..?」
「모험가들 대부분이 인간이어서 제국의 편을 들겠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아무런 소속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제국이 인간 세상에서 많은 땅을 지배하고 있다고는 하나 모든 인간이 제국에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기에 잘만하면 우리쪽에서도 모험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가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클론터의 또렷한 눈동자에서 여왕은 신뢰를 느꼈다.
「그렇군요... 그럼 어디로 가실 건가요?」
「인간들이 알프라이라 산 근처에 캠프를 설치하고, 주둔지로 삼았습니다. 그곳은 모건님의 조사지와도 가깝고 샤란님과 연락하기도 좋은 곳입니다. 저는 메이아 여왕님의 직속 전령으로서 인간의 주둔지에 머물겠습니다.」
「인간들의 주둔지에? 그들이 클론터님을 해치려할텐데..?」
「걱정 마십시오. 원래 전통적으로 전령은 죽이지 않는 법입니다. 하하. 또한 그들에게 저는 이용가치가 높을 터이니 금방 어쩌지는 않을 것입니다.」
「흠...좋아요. 그럼 저에게도 자주 연락을 주시고, 부디 조심하세요.」
「예. 여왕님. 그럼.」
클론터는 여왕의 궁정에서 나와 자신의 라미나비엔토(Laminaviento, 하늘을 날 수 있는 호랑이)에 올라타면서 생각하였다.
'그래도 젊은 여왕님이 줏대가 있어 고집쎈 원로들에게 휘둘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여왕님 혼자힘으로 언제까지나 원로들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어. 우리 흑요정은 근본적으로 호전적인 종족이니까. 빨리 이번일의 진상을 밝혀내지 않으면 기어코 전쟁이 일어나고야 말겠구나.'
힘차게 언더풋 입구 위를 날아오르는 라미나비엔토. 온 얼굴로 불어닥치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클론터가 먼 하늘의 한점으로 사라진 후에도, 라미나비엔토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는 여전히 여운을 남기며 언더풋의 상공을 떠돌고 있었다.
출처 : 던전앤파이터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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